발타자르 그라시안은 1601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입니다. 성직자였지만 그가 남긴 글은 신앙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다룬 책이었습니다. 1647년에 낸 〈오라클 마누알〉— 우리말로 옮기면 "손안의 신탁" 쯤 되는 책은 300개의 짧은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죽고 한참 뒤에 유럽에서 다시 발견됩니다. 쇼펜하우어가 직접 독일어로 옮겼고, 니체도 아껴 읽었다고 전해집니다. 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일의 어려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보여주지 말 것
그라시안이 가장 자주 돌아오는 주제는 "절제"입니다. 힘을 아끼고, 속을 다 내보이지 말고, 기대를 남겨두라는 것. 겸양의 미덕이라기보다 냉정한 관찰에 가깝습니다.
속을 다 내보이지 마라. 다 알려진 사람에게는 아무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능력의 끝을 다 보여주지 마라. 남은 것이 있어야 사람이 커 보인다.
바랄 것을 남겨두어라. 다 가진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다.
때를 아는 일
두 번째로 자주 나오는 것은 시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만큼 언제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그는 물러설 줄 아는 것도 나아가는 법의 하나라고 썼습니다.
흐름이 좋을 때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운은 끝까지 함께 가주지 않는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리지 마라. 사람들은 지는 해를 배웅하지 않는다.
사람은 첫인상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마지막 매듭이 그 사람을 남긴다.
혼자 있는 시간에 관하여
처세를 말하는 책이지만, 결국 사람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오래 이야기한 끝에 그는 이렇게 씁니다.
남이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자리를 비워보아라. 있을 때보다 없을 때 그 값이 드러난다.
사람은 완성된 채로 태어나지 않는다. 날마다 조금씩 자신을 빚어갈 뿐이다.
원전에서 새로 옮긴 이유
위 문장들은 시중 번역서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1647년 스페인어 원전에서 저희가 새로 옮긴 것입니다. 원전은 저작권이 소멸한 공유 저작물이지만 번역은 그 자체로 별개의 저작물이라, 남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 싣는 것은 그 번역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전을 직접 보며 옮기다 보니 뜻밖의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라시안은 잠언마다 제목 한 줄을 달고 그 아래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덧붙여 두었는데, 그 뒷부분이 오히려 더 좋을 때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라 편이다"라는 한 줄 뒤에는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먼저 자신의 주인이 되어라. 그래야 비로소 남의 주인도 된다. 서두르지 않는 멈춤이 성취를 익게 하고, 시간은 어떤 힘보다 많은 일을 해낸다.
첫 출시부터 담았습니다
그라시안의 잠언 300개는 출시할 "명심✦명언"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읽어도 울림이 있는 것들을 골라 지혜·인간관계· 결단력 같은 주제에 나눠 넣었습니다. 매일 아침 한 문장씩 만나게 될 거예요.